개미와 베짱이

기발한 문장 부호 사용

湖月, 2015. 9. 29. 19:10

기발한 문장부호 사용


 

                       조향순          


 

시인들의 기지는 참으로 놀랄만하다.

문장 부호 하나만으로도  시인은 아주 많은 내용과 감정과 상상을 불러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쉼표(,)는 반점이라 하여 주로 문장 안에서 짧은 휴지(休止)를 나타내거나,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에 쓰이는 문장 부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 시에서 쉼표(,)의 놀라운 활동을 본다.  이 시에서는 쉼표(,)밖에 없다.  쉼표(,)로써 시인은 상황을 기막히게 전달한다. 기발한 쉼표의 사용 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슬프고 아픈 사건이라 일반적인 문장으로 주루룩 표현해버리면 비정하고 억울하다. 그 슬픔, 그 쓸쓸함, 그 애처러움이 너무나 커서 도무지 정상작으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중간 중간 잠깐씩 쉬어야겠다.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너무 슬퍼서, 너무 쓸쓸해서, 너무 애처러워서, 너무 화가 나서 도무지  얘기를 지속할 수가 없다.  시의 끝 문장 역시  쉼표( ,)로  끝나니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만큼 슬프고 쓸쓸하고 애처럽고 화가 나는 사건이다, 야무지게 말을 끝맺음할 수 있는 정신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끝을 맺을 수도 없다.


마른, , 알을 입에 문 여자가, 204호에서, 죽은 쌀벌레처럼 웅크린 채, 발견, 되었다, 죽음의 , 외부가 공개되었다, 쌀도, 가족도, 유서도, 없었다, 죽음의 원, 인과 결, 과만 남았다, 수사기록에는 그녀의 몸에서, 감춰두었던 울음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고 쓰여 있다, 형사와, 의료진과, 앰뷸런스와, 동사무소 직원이, 그녀를 죽음,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녀가 이승에서, 단순하게, 떨어져나갔다, 이승의 반대편으로 앰뷸런스가, 떠나고, 형사와, 동사무소, 직원이, 가정식, 백반을, 들며, 소주를, 마신다, 골목의 소음들을 한 모금에 꿀, 꺽, 삼킨다, 식당 주인이, ,, ,, 부채를, 부치고, 있다,

                                                                                                   < 어떤 울음/ 서안나>


 줄임표(......) 할 말을 줄여서 쓸 때나 말이 없음을 나타낼 때에 쓰인다. 그리하여 여운을 주거나 강조를 해주는 효과를 얻는다.  (......)는  주로 문장의 맨 끝에 쓰이는데,  이 시에서는 문장의 맨 앞에 와 있다. 그러고 보니  줄임표가 꼭 문장의 뒤에만 오라는 법은 없다. 이걸 눈치채고 기발하게 사용한  이가 시인이다. 

문장의 맨 앞에  턱하니 줄임표(......)가 놓여 있으니 이미 시작 이전에 무슨 이야기가 줄여져 있다는 말이 되겠다. 줄임표 뒤의 얘기를 보니,  한번은 내가 이쁜 도라지꽃으로 피어 있는데도 그대는 먼 길을 빙 돌아서 가버린 인연이고, 또 한번은 옆방에 그대가 든 줄도 모르고 골아떨아졌던 인연이다. 둘 다 나도 모르게 어긋나버린, 어긋난 줄도 모르게 어긋나버린 인연이다. 이런 인연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그래서 시의 첫머리에 쓰인 줄임표는 이미 이 시가 시작 되기 전에도 이런 종류의 어긋난 인연들이 여럿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인에 의해서  이렇게 임표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다.  


...... 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사랑을 놓치다 / 윤제림>


 요즘  시에서는 마침표(.)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또한 나름대로 그 연유를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마침표(.)는 온점이라 하여 서술, 명령, 청유 등을 나타내는 문장의 끝에 쓰이는 부호이다. 시에서 마침표(.)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끝을,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는데, 생각 혹은 여운은 줄곧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개미와 베짱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쓰기를 위해서  (0) 2022.06.19
합성어와 파생어의 띄어쓰기  (0) 2019.06.04
녹음기 사용하는방법  (0) 2014.09.17
시낭송 제1강  (0) 2014.09.17
시낭송 제2강  (0) 2014.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