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 안행덕
속 시원히 퍼붓지 못하고
눈치 살피며 질척대는
혼잣소리
구시렁구시렁
본대로 들은 대로
이실직고 못 하는
처량한 네 속이야 오죽하랴 만
차가운 바닥에 맨몸을 던져
속죄하듯 조아리며 내리는 겨울비
투 두둑 떨어지는 찬비
동그랗게 그려내는 꽃송이들
소란 떨지 않아도
내게 들리는 그 고백
가난한 비둘기
오갈 데 없던 비둘기 일가에게
장전역 아래, 간이쉼터는 비를 피하기 안성맞춤이다
밤낮없이 철마가 덜컹거려도 가난한 비둘기한테는
아늑한 적멸보궁이다
쉼터의 운동기구들이 몸살을 하는 동안
무심한 중년들 힐링의 몽환에 빠져들고
아이들 새떼처럼 지저귀고 떠들썩해도
허공을 가르고 사뿐히 내려온 비둘기 떼
설움에 지친 날개 접고, 어리어리한 눈 비비고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여기저기 살피며 콕콕 찍어보고 고개 끄덕인다
곡선으로 살아가는 삶이어도
하늘을 소유하고 모든 허공이 제 것이라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너그러움이 맨발이어도 좋다
선로 위 전철은 굉음을 내며 달려도
이제 쫓겨 가는 일 없지 않은가
그대 많이 아프신가요/ 안행덕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인형이에요
그대 강렬한 시선이 두려워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쨍그랑 깨질걸요
아마도 붉은 피를 흘릴 거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에요
무섭고 두려워 세상과 벽을 쌓고
가슴에 가시만 키우고 살았어요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대 가슴 피로 물들 거에요
어느새 한 발짝 다가 오셨군요
위험해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밭인 줄 알면서 들어오시다니
그대, 많이 아프신가요
내 사랑 진주 / 안행덕
어느 날부터인지 기억은 없지만
속이 메스껍고 더부룩해서
병원을 찾았지요
의사선생님은 몇 가지 문진만 하고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합니다. 한다
무슨 말인지 의아한 내 표정을 보고
환자분은 지금 몸 안에 보석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황홀한 보석이 자라기 위해
자리를 잡고 집을 짓느라 자궁에서 망치질하네요
네? 하고 놀라고 겁을 먹은 그 날 이후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진주가 태어났지요
문풍지와 겨울바람 이야기 / 안행덕
겨울밤이 깊어 갈수록
풀 먹은 창호지
팽팽하게 달빛을 잡아당기고
낡은 문살마다 내려앉은 달빛
희끄무레한 필체로
창호지에 그려 넣는 그림자 난해하다
찬바람 발을 동동거리며
난해한 문장을 해독하려
호시탐탐 문틈을 엿보는데
문설주에 떡 버티고 선 문풍지
부르르 떨며 찬바람을 막아서는데
따스한 방 안의 할머니
안된다 안된다
아기가 잠들었다
잉잉거리며 우는 바람을 달래며
너도 이제 그만 자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