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진입로에있다
향단(보물 제412호)
초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양동마을)
날씨도 좋고 가을 여행이나 가자며 배낭을 메고 나왔다
평소에 가고 싶던 경주 양동마을(세계 문화유산 등재된)과 포항 죽도시장에 가서 놀다 오잔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소재 민속마을)
한 시간 반 쯤 운행하여 당도한 양동마을 멀리서 보아도 날아갈듯 한 기와집이 한눈에 보인다.
경주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은 4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 하니 다시 한 번 감탄사가 나온다.
요즘은 30년만 되어도 재건축을 한다 하는데
4백년이 되어도 원형이 그대로이고 처마의 아름다운 선이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조선시대의 상류 주택으로 높은 곳에 기와집과 그 아래 초가집이 잘 어울리는 마을에는
양반과 하인의 계급이 옛날을 말해주는 듯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학자와 효자가 많이 나왔다는 말을 입증하는 듯 마을에 서당이 곳곳에 있다.
조선시대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과 성리학자 이언적(1491-1553)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하니
유서 깊은 양반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瓦家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며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 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인 것은 좋은데 잠시 앉아 쉴 곳도 없어 조금은 힘든 여행이었다.
지금 막, 박물관 등 관광지로 조성 중이라 어수선 하기까지 하다. 몇 년 후에 다시 찾아와 천천히 선조의 깊은 뜻과 건축미를
다시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포항 죽도시장이 있으니 구경도 하고 싱싱한 회로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죽도시장이 정말 크다.
활어시장만도 자갈치나 민락동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펄펄뛰는 활어들과 손님을 잡으려는 상인들과 손님들의 실랑이가 살아있는 삶의 현장이다.
이리저리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좌판에 누워있는 생선도 윤기가 나는 게 싱싱해 보이고 비릿한 바닷가 냄새가 또 다른 활력을 준다.
시장바닥을 돌고 돌다 보니 벌써 어두워진다.
나이도 들고 밤에 운전하기는 어려우니 찜질방에서 하룻밤 쉬기로 하고 중앙 사우나에 차를 대고
느긋하게 다시 활어시장을 활보하는데 광어도 우럭도 싸게 드립니다. 하며 길을 막는 사람이 있다.
머리를 들어보니 <공주 수산>이라는 횟집이다. 24시간 영업을 한다고 하니
천천히 먹고 마셔도 될 것 같다. 입구는 작아 보였지만 2층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다.
생각보다 더 싱싱하고 친절한 서비스에 하루의 여정을 풀 수 있었다.
다음 날(10월17일) 나온 김에 구미 박정희 前 대통령생가까지 가자는 옆 지기 말에 동의하고
시장 내 대화식당에서 된장찌개 정식으로 아침을 먹는데, 생김치에 고등어구이에 꽈리고추 무침에 나물무침 야채까지
너무 푸짐하다. 혹시 또 올일 있으면 여기 또 오자며 야속도 했다.
포항에서 구미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박 대통령 생가는 찾기 쉬었다.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도로표지판에 안내 표시가 있어 묻지 않아도 바로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표지를 따라갔다.
대구 사범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와 새마을 부흥까지의 역사적 사진이 있었고 생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초가는 방 2칸, 부엌1, 디딜방앗간, 마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박 대통령께서 태어났다고 한다.
과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는 유일한 건물이란다.
여기서 박 대통령 아버지 박성빈은 온 가족과 함께 황토 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인 두 초가를 지었다.
안채는 북향.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박정희가 쓴 [나의 소년 시절]에는 '이 집은 6·25 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임시 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세계적 경제 혼란에 처해있는 지금,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쉽을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의 경제성장을 이뤄낸 대통령이며 그의 지도력과 추진력은
현재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의 톱 모델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만, 일궈 낸 업적보다도
독재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더 크다니,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과거를 현재에서 보는 입장에서 업적은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면
생가 기념관은 초라하고 업적을 기리지도 않아 아쉬운 점도 있었다.
옆 지기는 추모관에서 묵례를 하고 방명록에 增産. 輸出. 建設. 이라고 여섯 자를 적는다.
아마도 60년대를 회고하며 물자를 절약하던 어려웠던 시절의 구호를 잊지 않은 듯하다.
2010년10월 18일湖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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