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江(詩集)

비내리는 강 제5부

湖月, 2014. 7. 10. 15:56

 

 

제5부

연어가 되어

 

 

안족雁足

기럭기럭 노래하며 하늘을 날아야 할 새

거문고 등에 잡힌 발 꼼짝 못 하고

V자로 날아가던 옛날을 그리며

3천 피트 높이 날아오르던 추억에 잠긴다

멀고 먼 길을 날아가듯이 발가락 자꾸 꼼지락거리며

하늘 높이 허공을 가르던 멋진 모습 그리며

거문고 몸통을 밟고 탐색이 시작된다

 

지상의 음률에 빠진 저것들 날개를 잃고

허공을 헤집어 길을 내던 발가락 까딱거리며

난해한 악보에 기러기 그려 넣고 물음표 던져 넣으며

거문고 줄에 묶인 발등으로 잊었던 바람 소리 듣는다

 

가끔 하늘길도 지워진다는 걸 아는 기러기

제 발가락을 잡고 애절하게 우는 거문고 달래며

허공에 쓴 간절한 사연 기억해 내어 동기 당기당

그 울음 받아먹고 목이 멘다

 

 

우산

 

 

가버린 첫사랑 등 뒤에

퍼붓고 싶은 얄궂은 심통처럼

정수리 두드리며 무수히 쏟아지는 비

 

비 오는 사이길 골목 사이로

당신의 우산이 되어 사뿐히 나서는데

빗속을 걸으며

내 손을 꼭 잡고 가시던 당신

 

허름한 제 몸 적셔 파르르 떨며

싸늘한 설움 차마 내색도 못하고

녹아나는 정 다 퍼주어도

비 갠 오후

쓸쓸히 버려질 줄이야

 

오로지 젖지 않게 하려는 마음

시린 몸 젖는 줄도 모르고

버리러 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그대의 따뜻한 손만 기억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그리워짐은

낯 설은 타향의 이질감 때문인가

마지막 남은 달력의 외로움이

여자의 펄럭이는 치맛자락처럼

깃발처럼 흔들리는 날

문득 뜻 모를 눈물 하나

눈썹에 매달고

서성이든 발길은 집을 나선다

아무도 모르는 피안을 찾아서

아름다운 일탈을 꿈꾸며

조금은 어릿한 몸짓으로

바람같이 구름같이

길 떠나리라

 

 

바다 체험장에서

 

 

바다는 찰박거리며 휘파람 불고 온다

설천면 문항리 체험장으로

조개며 낙지 숭어 도미까지

바다는 일용할 양식을 가득 싣고

수평선 넘나들며 어렵게 얻은 보물을

미련 없이 내어준다

웬 성품이 저리 너그러운지

바다 같은 마음이라더니 세를 받을 기미는 없고

언제나처럼 또 여유롭게

온몸을 출렁이며 손 흔들어 보이고 간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통 큰 저 여유

남몰래 슬쩍 훔쳐보고

넓은 갯벌 둘러보니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라고는 없다

슬쩍 들이마신 공기도

찰박거리며 즐기는 물살도

저 멀리 넉넉한 하늘도 구름도

모두 불평 없이 제 몸을 내어 준다

 

나는 바다가 내어준 촉촉한 뻘밭에서

파도가 전하는 연서를

젖은 몸으로 받아 적고 있다

 

 

 

 

꽃비 내리는 날

 

 

아마 그게 봄날이었나 봐

안민산 벚꽃 길에서 허망한 봄을 만나고 있었지

꽃잎이 바람에 날려 나비처럼 날고 있었어

내 머리에도 어깨에도 사뿐히 내려앉았는데

어찌나 가벼운지 살짝 내딛는 내 발걸음에도

휘리릭 날아가 버리는 거야

꽃 나비처럼 날개를 팔랑이며 나풀거리는 벚꽃

지는 꽃잎이었지

 

어제 같은 옛일들, 꽃잎의 고백으로 흔들리고

나태해진 바람은 봄을 안고 뒹굴고 있네

날개 접은 나비 같은 꽃잎 나른한 문장으로

머리에도 어깨에도 가슴 속까지

한줄기 미련으로

꽃비가 되어 나를 적시네

 

 

고인돌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무덤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문이라지

 

고창 선운사 아랫길 흩어진 너럭바위

돌무덤은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있었다는데

누가 여기에 이들의 유택을 마련했을까

밤하늘에 별들만큼이나 많은 긴 세월

이곳을 지켜온 귀신들 아직 있을까

천 년의 세월 오랜 풍상에

넘어지고 쓰러져도 꽉 다문 입

아무도 모르는 저 고인돌의 비밀

주인을 지키려 비바람 맞으며 그 자리 지킨

육중한 돌무덤이 고택처럼 빛난다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여기에 잠든 혼령

그 옛날과 현세를 다 알고 있을까

천 년의 나이테도 숨겨놓은 역사의 흔적에

나는 왜 등골이 서늘해지는지 모르겠네

 

 

얼굴

 

 

가면으로 가려 보아도

언제나 얼은 살아 숨 쉰다

바로 통로가 있기 때문이지

기쁨이 잘 통하는 곳

감사가 잘 통하는 곳

희망이 잘 통하는 곳

슬픔을 숨길 수 없는 곳

하루하루 영혼이 살아 있는 곳

얼굴은 정직하다네

 

어떠한 장애물이 길을 막아도

언제나 통로는 열려 있느니

생각이 잘 통하는 곳

영혼이 잘 통하는 곳

생명이 잘 통하는 곳

마음이 잘 통하는 곳

얼굴은 영혼의 집이라네

 

멍한 사람들을 보면 얼빠졌다고 하는 말

그냥 하는 말 아니었네

 

 

밀양 영남루

 

 

찬연한 고색을 자랑하는 영남루 처마에

오백 년 한이 서린 처마 끝 영롱한 단청

무심히 흐르는 강물 말없이 바라본다.

 

밀양강은 아랑 전설 시시콜콜 흘리며 가는데

뜰아래 배롱나무 꽃잎마다 아픈 사연 안고

소리 없이 피어 아직도 선혈처럼 붉어라

 

처연한 봄날 하루는 서둘러 저물어가고

아랑낭자 입술에 맺힌 서러운 한처럼

목매듯 하얀 낮달이 걸린 허공만 푸르다

 

 

계절의 음모

 

 

일제히 환성을 지른다

봄이다봄이다

한참 달아오른 화냥기

마음이 급하다

겨우내 다듬고 기다린 문장들

가지 끝에 내걸어야 한다는 조바심

 

나목의 헐렁함이 모두 자기 탓인 양

느슨하게 빈둥거리던 햇살이 바쁘다

땅속 깊이 머뭇거리는 출렁거림 밖으로 불러내고

우듬지로 흐르는 푸른 물소리 전하며

실바람 불러들여 내통을 부추긴다.

 

가지 끝에 걸터앉은 햇살, 화냥기로 들뜬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고 황홀함의 뒤에 오는

채색의 쓸쓸함을 한 다발의 푸르른 문장으로

엮어낼 달달한 연애를 남몰래 꿈꾼다

먼저 질펀하게 봄을 불러들인 죄목으로

모가지 뎅겅 잘리는 참수를 당해도

꽃피우고 싶은 저들의 욕망을 꺾지 못하리

 

 

노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나이가 들면서 실감 난다

가까이서 잘 보이던 신문 글씨

어느 사이 걸어 나갔는지 몇 발짝 저만큼 나가 앉아있다

무릎걸음으로 내게 은밀히 다가오는 생의 전환점

생의 경계를 한고비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내 속에 꿈틀거리는 무의식은

언제나 청춘인 줄 착각하면서

시각의 제한이 협소해지는 걸 꽃의 유혹이라

건방진 에고ego는 괜찮다고 위로했었지

방책 없이 심통을 부리는 세월을 너무 얕잡아본 게야

신문을 30센티쯤 뒤로 당기며

노안을 생각해 보는 나

이제야 멀리 보겠다는 아량이 생긴 거다

 

 

개와 늑대의 시간

 

 

졸다가 지친 가로등이 깜박 잠드는 시간

너무 환하지도 깜깜하지도 않은 때

주술에 걸린 듯 잠을 털어내는 새벽

이런 때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한다지만

어둠은 아직 길을 감추고 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골목을 빠져나와

달아나는 어둠을 쫓아 숲길로 접어들면

싱그러운 풀 향기 속에 희끗희끗한 물체는

분명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온통 긴가민가하다

어슴푸레한 숲은 온통 비너스 조각상처럼 환상적이다

숲과 나무와 바위로 모습이 점점 드러나며

어둠과 빛이 밀고 당기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밤새도록 씨줄과 날줄이 만들어낸 작은 공간

오르락내리락 헤매던 나

지루한 밤이 지나고 희붐한 새벽이 와도

굴뚝같은 내 속은 여전히 깜깜하다

개와 늑대를 분간 못하는 새벽처럼 어슴푸레하다

아직도 원고지는 날 붙잡고 유혹하지만

 

제집을 찾지 못한 쇠똥구리가

쇠똥을 오르락내리락하듯

나는, 온전한 시를 찾지 못하고

사막의 사구沙丘를 넘으려는 바람처럼 아득하다

 

 

 

거울 속의 여자

 

 

거울 속의 도도한 여자

나를 보고 아는 척한다

빙긋 냉소 같은 미소를 짓다가

화장기 없는 그녀

갑자기 생각난 듯 눈썹을 그리며

나를 빤히 보고 말을 건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렇게 오래 살고도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여자야

잘난척하는 낯설기만 한 그녀

한심한 듯 나를 한참 보다가

물보라 색 등꽃 같은 입술로 속삭인다.

네 마음의 빗장을 풀어라

텅 빈 마음의 곳간을 열어라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

내 가슴에 체한 듯 걸려있는 답답증을

거울 속의 여자가 눈치챈 모양이다

날 위로하던 거울 속 여자가 먼저 눈물 흘린다

 

 

소나기- 비 1

 

 

벌떼처럼 쏟아내는 저 언어

할 말이 참 많았나 보다

검은 구름 속에 갇혀

얼마나 답답했으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휘모리장단으로

양철 지붕을 저리 두들겨 댈까

그래

풀지 못한 응어리 있거든

다 토해보렴

울음 섞인 성난 목소리

세상이 다 젖도록 울어보렴

아름다운 무지개 뜰 때까지

 

 

여우비- 비 2

 

지나가는 비에 옷 젖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처럼

갑자기 밀려드는 설움

주체하지 못하고

확 쏟아지는 눈물처럼

그렇게

하늘도 그런 날이 있나 보다

맑은 하늘을 스치고 지나가는 비처럼

지나가는 게 소나기뿐이랴

인생도 사랑도 청춘도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걸.

 

 

나는 풍선이 되고 싶네

 

 

두둥실 떠가는 저 풍선이 나였으면 좋겠네

뒤틀린 심사 가볍게 밟고 두둥실 가고 싶네

어지럽고 고약한 냄새 풍기는 정치 비리니

사학이 어떻고 줄기세포가 있니 없니

그딴 것은 저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나는 그냥 풍선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네

하늘 높이 올라 구름처럼 떠돌다

비가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하고

그러고도 모자라면

나를 다 내주어도 좋겠네

 

아직 덜 익은 포롬한 탱자 같은 세월 불러내어

뽀송뽀송한 씨앗 몇 개 쥐여 주고

미련 없이 바람 따라 흘러가면 좋겠네

끝도 시작도 없는 하찮은 실랑이에 지친 나날들

바람에 날려 버리고 구름을 타고 떠도는 신선이 되어

하늘 끝 어디쯤에서

모든 세상 것들 내려다봤으면 좋겠네

 

 

연어가 되어

 

 

거울처럼 맑은 강바닥 큰 돌 작은 돌 사이에

수초를 배열해 진경산수화다

흐르는 물살에 여린 제 몸 뉘어 놓고

넓은 바다를 그리워한 것은

타고난 떠돌이 천성 때문이리라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은 가고 싶은

강가의 밤하늘별처럼 아득 하기만 하다

짠물이 아닌 담수가 그리워진 것은

다만 향수병이 도진 연어의 생리만은 아니리

부옇게 먼지 낀 창문 같은 마음 닫아걸고

찌든 골목길 돌아 나오면 그리운 강의 기류

 

야윈 어깨가 기울면서

자꾸 돌아보던 눈언저리가 촉촉한 어머니

흔들리며 아른거리는 그 강변의 풍경

처음 보았던 세상 처음 맡아본 냄새

거기 어머니 젖내 물씬 풍겨

회귀回歸를 꿈꾸는 연어가 되었는가

 

 

고리수(고로쇠)

동백 매화 산수유 꽃물결 일렁이는 이른 봄

덕유산 밤이슬 머금은 고리수骨利樹 뿌리는

화강암 잔돌이 어지러운 길따라 맨발로 미로를

헤매며 신화를 찾는다. 그 옛날 도선국사

백운산에서 살려낸 고리수 전설이 이력이다

고리수 전설은 누군가의 밥이 되고

사랑이 되고 눈물보다 아름다운 적선이 되고

고로쇠나무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수액은

맥을 따라 흐르는 수혈樹血이다

제 피를 다 내어주면서 말없이 하늘만 보며

아~ 하고, 아파하는 저 나무의 신음

들어본 일 있는가

 

 

겨울 바다에서

 

 

겨울 해운대 백사장 참 한가롭다

한여름 북적이던 인파는 아득한 옛일처럼

넓은 백사장에 밀려오는 파도만 철썩일 뿐

몇몇 아이들이 연을 날린다

하늘 높이 오른 가오리연 꼬리에 매달려

여유로운 나를 내려다보는데

철썩철썩 철없는 파도만 보챈다

 

줄 끊긴 가오리연 하나 멀리 날아간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하얀 파도 따라

선홍빛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연

참으로 느긋하게 여유로워 보인다

목을 조이는 연줄도 없고,

감았다 풀었다 제멋대로인 얼레도 없다

나도 자유로운 저 연 따라 날아가고 싶다

 

 

바람처럼 가리라

 

 

창백해진 내 영혼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

언제부터였나

비릿한 혈흔조차 숨기고

세월은 나를 조금씩 베어 먹고

나도 모르게 점점 가벼워진다

하루하루 그렇게 여위어 가도

꽃잎 같은 칼날이 비수 되어

내 안에 사는 줄 몰랐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푸시킨 詩를 꼭꼭 씹으며

귓가의 마지막 속삭임에

그래그래 세월 탓이 아니야

혼자서 위로를 해도

비탈진 내리막길에서 쪼그리고 앉아

흘린 눈물 얼마인가

민들레 속씨가 미래를 약속하듯이

언젠가는 나도 바람처럼 가리라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꽃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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