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江(詩集)

비 내리는 강 제3부

湖月, 2014. 7. 10. 16:01

 

제3부 / 이안류

모퉁이 앞에 서면

 

 

길을 가다 모퉁이를 만나면

불안이 먼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보이지 않는 저쪽에 무슨 음모 있을지,

철조망을 뚫고 월경해야 하는 난민의 심정으로

낯선 모퉁이를 돌아가는 동안 심장은 쿵쿵거린다

가슴 깊이 묻어둔 생의 빌밀 문서라도 들킨 양

길 잃은 고양이처럼 두리번거린다.

살면서 모퉁이 앞에 서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생의 골목마다 돌아선 그 사람 등짝 같은 모퉁이

늘 나를 안달 나게 하는 비밀스러운 어둑한 저쪽

바람 등지고 바람을 쫓는 이 간절함

막막하고 아득함이라니

살면서 몇 번이나 돌았을까? 고비 고비 돌 때마다

세상은 늘 어둠과 빛 사이를 방황하게 하고

비릿한 어둠을 날것으로 먹으며 생의 등고선을 넘나들 때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 들으며

나는 또 불안한 모퉁이를 돌다 보면 어느새 환해지는 길

달력 한 장 넘기듯 생의 한 모퉁이 또 돌아간다

 

 

인터넷 인생

 

 

나는 오늘도 나만의 집을 짓는다

아무도 허물지 못할 철옹성 같은 나만의 성을

개미의 열정으로 차곡차곡 쌓고 있다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방에서

삶에 밴 외로움을 달래고 느긋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의 내면이 있는 풍경을 내걸어놓고 누군가를 향해

지친 걸음 쉬어가라 말 걸어본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어 달라고 발가벗은 채 대죄하기도 하면서

<엔터키> 한번 치면 바람처럼 사라질 허무한 집

내 사랑은 도도하게 허공으로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인터넷이다

통신망과 통신망을 연동해 놓은 망의 집합

언제나 오류가 발생할 것이다

살다 보면 실수로든 고의로든 <엔테키>를 치게 된다

그리고 오류는 바람이 되어 삶을 흔들어 놓고

산천을 울리며 공간과 시간을 날려버릴 것이다

처음부터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실천했더라면

노심초사 오류를 두려워하진 않았겠지

 

 

원주율 π

 

 

​동그라미를 원이라고 하지

접시 시계 반지 컵 쟁반

동그라미로 열리는 것들에게

원의 지름과 둘레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

원의 둘레는 지름의 3.14배가 된다고 하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고 발가벗은 채 뛰어 나왔어도

인간사에 원주율이 있다는 건 모를 걸

둥근 울타리를 치면서 동그라미 안에는

매운 눈물이 갇혀 있는 걸 알았지

아들딸, 손자, 며느리, 사위

일만 겹의 풍랑이 동그라미 안에서

둥글게 둥글게 살려고 고민하지만

살다 보니 모가 나고 꼭짓점도 보여

흉한 곳 잘라내려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꼬리의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소수점

원주율이 인간사에도 있다는 걸 알까

 

 

곡비

 

 

한여름 지난 숲 속의 매미 소리

참을 수 없는 호곡이다

냉혈의 숨 가쁜 절명사絶命辭

꽁댕이 치켜들었다 놨다

억울해서 못 참겠다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고

격정적인 호곡은 쟁명한 숲을 흔든다

나도 저렇게 속 시원하게

울고 싶을 때 더러 있다

세상사 살다 보면

이런저런 울고 싶은 날 한두 번인가

한평생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속으로 삼킨 울음이 얼마인가

그래 그렇게 나 대신 실컷 울어라,

가슴에 묻어두면 병이 되느니

그래, 네가 바로 곡비로구나

주책없이 흐르는 내 눈물 받아먹고

저렇게 목 놓아 울어대는구나

 

 

 

동해부인의 사랑

 

 

갯바위 잔등에 차린 곤궁한 살림

보랏빛 커튼을 내리고

물빛을 배경으로 촉수를 열고

단단히 문단속한다

세월의 굴레에 인정을 촘촘히 누비며

서로서로를 꼭꼭 끌어안고

단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네

 

시샘 많은 파도와 풍랑도

저들의 사랑 앞에는

그냥 헛발질로 물거품이 되지 않는가

속 깊은 저들의 끈끈한 정

헐렁하기 그지없는 우리 가슴에도

동해부인의 끈끈한 사랑꽃

환하게 피었으면 좋겠네

 

 

금정산 계곡에서

 

 

산성 북문에서 내려오는 등산로 길

솟대들의 울음이 발길을 붙잡는다

마른 가지 높이 올라앉아

목 놓아 우는 나무로 만든 새

언덕배기 황량하게 부는 바람이

솟대를 대신하여 울어주는구나

가슴으로 우는 네 울음이 낭자하게 굴러

이토록 수많은 바윗돌이 되었나 보다

 

금정산 계곡 물 모퉁이 돌 때마다

은은히 들려오는 범어사 독경소리

굽이굽이 쌓인 네 서러움 에둘러

한 음절씩 졸졸 풀어내는 서러운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경전이고 탑이네

 

 

상처 1

 

 

어젯밤 하늘은 비상계엄령이 내렸었나 보다

밤새도록 물 포화 가혹한 폭우

쏟아지는 물 포탄 맞아 쓰러진 산동네 작은 판잣집

거기서 떠내려 온 너와 나의 장벽 같은 신발 한 짝

융단처럼 퍼붓는 빗속에 흥건히 젖어

홑겹으로 떨고 선 애처로운 전신주 아래

밤새도록 공포에 떨며 흐느낀 듯 기진해있다

 

비에 젖은 저 신발 같은 당신 때문에

대지를 헤집는 물살처럼 아프게 울던 날

휘청거리는 신음이 상처가 되어

하늘의 비상 뇌관을 건드렸나 보다

 

 

상처 2

 

 

가난한 내 영혼을 부르는 듯

봄비가 소리를 내며 창을 두드린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니

사선으로 내리는 비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며 절규하고

맨땅에 사정없이 제 몸을 던지고 있다

낯선 길을 헤매다 아프게 무너지는 가슴

나도 그런 날, 더러 있었다

 

속살까지 푸르게 물든 풀잎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빗물

울음으로 그 슬픔이 씻겨질까

내 설움도 빗소리와 함께 흘러라

사선으로 빗금을 긋는 저 서러운 빗방울

나도 한때는 엇나가는 삶에

그렇게 서러운 날, 더러 있었다

 

 

애상哀傷

얼마나 마시면 흔들릴까

얼음 몇 조각 유리컵에 넣고

시바스를 약간 부어 흔들어 본다

코끝에 알짱거리는 향기를 탐하며

혀끝으로 슬쩍 음미한다

 

넋 놓아버린 사랑의 실타래 풀었다가 감았다

차오르는 설움을 술잔에 풀어 넣고

철 지난 디오니소스에 축배를 건네면

천천히 짐승의 본능 같은 전율에 떨고

알코올의 내력이 애증에 타는 목줄을 타고 흐른다

 

점점이 흐려지는 초점은 무언의 갈증으로

어둠의 바다를 항해하노라면

외면할 수 없는 그대, 노을빛으로 다가오고

흔들리는 술잔엔 부서지는 별빛만 가득하다

 

 

 

나비의 꿈을 꾸는 조가비

 

 

누가 만든 무덤인가

바닷가 한 모퉁이 소복한 조개 무덤

속 빈 조개들 쓸쓸히 모여앉아

갯벌에서의 추억담을 나누고 있는가

 

상처 난 갯벌을 어루만지듯

징검징검 걸어온 바람

죽은 조개 무덤에 앉는다

어젯밤 바다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슬쩍슬쩍 빈 조가비를 열어본다

 

적막보다 기막힌 서러운 무덤

헤엄치고 싶은 작은 꿈 잃어버리고

짓궂은 파도와

바람의 희롱에

찔끔찔끔 훌쩍이던 조개껍데기

등줄기 싸늘한 개흙 펄에 누어서

나비의 꿈을 꾸는지

빈 조가비 허공에 날개를 편다

 

 

화해는 없다

 

좁고 습기 찬 쪽방에

쪼그린 나상

비명도 없이

사라지는 반딧불을 보고만 있다

공기 속의 산소도 헐떡이며

점점 사지를 비틀어 숨이 막힌다

어지러운 세상

하직이라도 하고 싶은 게지

그녀의 비수는

순간을 가르고 비명도 없이

쓰러져

시퍼런 피가 그녀 발끝에

조금씩 차오른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몸이 점점 나른해진다

쪽방 촌,

이른 새벽에 장미 한 송이

어둠을 이고 왈칵 눈물을 쏟는다

 

 

동전 하나로 소원이 이뤄질까

 

 

해동 용궁사 구름다리 아래

빈 탁발 그릇 들고 앉은

돌로 만든 동자승

아서라 아서라 주문처럼 외워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들

동전 하나에 소원을 담아 던지고 던진다.

 

구름다리 아래 아득한 작은 탁발 그릇에

용케 떨어진 동전은 소리도 작지만

그릇에서 엇나가 돌에 맞은 동전 소리는

땡그랑 요란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 여기서도 통한다

 

염치없이 찰방찰방 떨어지는 가난한 마음

요행수 아니고 재미라며 너도나도

말 없는 동자승을 향해 던지는 주화

백팔번뇌 짊어진 채 동해를 바라보며

소리 없는 염불은 허공을 맴돌고

파도소리 죽비처럼 엄하게 경을 친다

 

 

해월정

 

 

외로움에 가슴 먹먹해지면 달빛 따라

해운대 해월정에 올라가 보라

팔각정 난간에 서면 탁 트인 바다가 보이고

솔 향 가득한 숲과 청청한 바다는 이야기꽃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더라

세상 풍파에 낡아빠진 난간, 삐거덕거리며

오래전 상처 끄집어내어

누구에게나 꼼꼼히 읽어보라 내어준다

그럴 때마다

바다를 끌고 온 해풍, 내게 말을 건다

내 가슴 파도처럼 출렁거려도

바람의 말과 바다의 말 다 알아듣지 못한다

해와 달이 놀던 자리 윤이 나고

바람이 앉았다 간 자리 허전하다

오늘도 청풍은 끝없는 바다의 비릿함을 끌고 와

해월정

난간에 바다이야기를 적어 달빛에 내어 건다

 

 

이안류

 

 

뜨거운 낭만이 넘실대는 해운대 해수욕장

어머니 품처럼 넓고 푸른 바다는

남몰래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화려한 비키니 신선한 몸부림을 시샘이라도 하는지

바닷물이 몸을 접으며 해안의 표면을 끌어당기는 순간

옳다구나, 거꾸로 몸을 뒤집는 파도

숨어있던 블랙홀이 숨을 들여 마신다.

추억과 행복 달콤한 사랑의 순간

이안류는 사정없이 여름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제 분수 모르고 명품을 쫒는 허상들

제 안의 얄궂은 허영이 역파도 부르는 걸 모른다

샤넬이니 루이뷔통이니 혀가 꼬이는 발음에

시도 때도 모르고 덤벼들지 마라

역으로 치는 파도에는 블랙홀이 숨어있느니

밸 꼬인 바다, 물살 한번 접으면 이안류 되고

부표를 놓치면 판도라 상자 되느니라

 

 

가을 선운사

 

 

화사한 가을 단풍 사이 울긋불긋

나들이객 질펀한 입담에도

선운사 뒤뜰 가지런한 돌담

묵직하게 함구하고, 천 년이 흘러도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시류에도 한눈팔지 않는 도량이

빛나는 별 안은 채 고색 창연히

대웅전 처마 끝에 머문다

 

천왕문 곁에 부복한 고인돌

케케묵은 세월 등에 업고

단풍처럼 붉었던 역사를 못 본체

처연한 몸, 만연체蔓衍體로 엎드려 있다

한 줌의 흙이 될 인생에 욕심을 버리고

비움과 가벼움의 진리를 깨달으라

검단 스님의 설법에 산적과 해적도

참선에 들었다는 이 절간 마당 귀퉁이

흘러가던 구름도 고요히 법화경을 읊고 있다

 

 

낙엽이 되어

 

 

쓸쓸한 가을 오솔길

소리 없는 울음이 굴러갑니다

한겨울 삼 동을 견뎌내려고

제 살붙이를 떨구는 나무

굳이 가을을 탓할 일은 아니지

속살까지 붉은 상처, 생의 경계를 넘어

잘 배색된 날개를 흔들며

빛바랜 수척한 하늘 아래

해 질 녘 외롭게 떨어지는 잎새

쉬어갈 자리를 잃은 바람

나를 붙들고 잉잉 울고 갑니다

텅 빈 마음 주체하지 못하던 나

바람 따라 길을 나선 게

낯선 거리를 서성이는

외로운 방랑자 되어 노숙합니다.

푸른 젊은 날은 몰랐지요

이별이 얼마나 서러운지

가을이 얼마나 외로운지

 

 

법기수원지 삼나무 숲에서

 

 

산과 산 사이 고요한 우물처럼

깊은 못 천연스레 숲 속 이야기 듣고 있다

 

육중한 몸 안에 숨겨둔 나이테를 허물고

삼천궁녀 드나들 궁궐을 꿈꾸어온

아름드리 편백, 삼나무 빽빽한 법기수원지

울창한 숲에 백 년쯤 묵혀 두었던 전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묵화를 그리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있다

햇살은 은빛 긴 바늘로

촘촘한 숲을 뚫어 빛을 밀어 넣고

큰 나무 아래 작은 풀잎은 가느다란 햇볕을

악기의 현처럼 팽팽히 잡아당긴다

청설모 한 마리 가만가만 바람을 잡고 흔들어

현을 퉁기며 연주하다가

긴장한 발목을 멈추고 기웃기웃 흔들리는 햇살 노려본다

수원지 맑은 물, 말없이 지키고선 침엽수림,

산책로

떠들썩한 오후의 수다에 경계가 삼엄하다

 

 

권태

 

 

작은 독방에 홀로 갇혀 있네

한 조각의 빛도 보이지 않네

적막처럼 흐르는 무거운 공기가

내 손과 발을 묶어 무기력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네

 

무덤처럼 어둡고 냉기가 서린 가슴을

너는 모르지

그래 알 리가 없지

 

사랑이 익으면 무슨 맛일까

날마다 사랑한다

꿀 같은 언어로 유혹해놓고

꽃술이 터지기도 전에 우두둑 꺾어 버리는

전설 속의 사랑가

 

 

그렇게 날마다

으르렁거리는 늑대가 차라리 낯설지 않음은

하얗게 퇴색하는 내 영혼이 유성처럼 지고 있음이야

 

차라리 귀가 말을 하라지

입이 있으면 무얼 해

 

서러운 손톱이 소리 없이 빠지며

자결을 꿈꾸듯 숨은 별자리를 찾는다

 

 

그런 날 아시나요

 

 

한마디 말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사정없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

가녀린 꽃잎에 꽂힌다

피 흘리지 못하는 꽃잎,

속으로 아프다

 

세상이 텅 빈 것 같은 날

바람 따라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날

왜 아득해지고 싶은지

산산이 흩어지고 싶은지

혼자가 아닌데 혼자인 것 같은 날

빈들에 홀로 허허로운 허수아비 같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본다

 

앵무새가 머릿속에 들어간 것인가

자꾸 같은 말 반복한다.

멀리 떠나고 싶다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천지가 깜깜하다.

오직 일탈을 꿈꾸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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