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낮달을 보며
동해의 꽃
- 주상절리
수 억 년 달아오른 뜨거운 가슴
아픈 심장 어쩌지 못해
소리 내어 울며 지표를 뚫고
붉고 거친 파열음으로 솟아낸 상처
꽃 한 송이로 피어
경주 앞바다에 아직 떠 있다
물길 연 파도가 꽃잎을 여닫는 동안
이제야 이별 길을 찾았는지
운명에 묶인 깊은 상처, 사슬 끊고
천 마디 말씀을 별들에 전하며
난장으로 패인 가슴 달래며 부채꼴로 누워있다
고대 희랍 신전 돌기둥처럼 차갑게
돌아앉은 마음 하나 달래보려고
바다는 오늘도 빗장을 풀고
쉼 없이 너를 향해 달려간다
파도는 수천 만 년 변함없이 너를 위해
먼 해조음 불러
꽃 같은 궁궐 한 채 짓고 있다
대竹 숲에서
하늘 제일 높은 곳 거기에 하늘빛 소원을 담아
청청 푸른 꿈을 키우며 산다
청빈한 새벽을 마디마디 새기며
가난을 사랑하였기에
마음을 비우는 일은 즐거운 낙이었지
빈방에 창문을 열고
미망의 늪을 헤매는 바람을 불러들이면
열 손가락은 음률을 퉁기고
절망이 깊을수록 언약도 깊었어라
꼿꼿한 성깔 대쪽같다. 나무라지만
청춘도 인생도 바람이거늘
바람도 구름도 믿을 것 못되니
믿지 못할 내일을 위하여
곧은 댓잎에 입 맞추며 한세상을
늴리리 타령, 흥 타령으로 살리라
외곬의 정갈함에
전설도 궁핍해지는 바람 앞에서
애써 감추려는 그리움 서럽기도 했어라
한 음절 넘길 때마다 굵어진 마디
절개의 고뇌는 미완으로 남겨두고
시린 마디마다 고이는 꿈은 완강하게
직립을 추구하며 청청 더욱 푸르러라
인생 고개(嶺)
쉬어갈 수도 없는 고개
곡절 많아 굽이굽이 쌓인 사연
봉우리마다 아픈 흔적 보인다
숨이 턱에 닿는 아득한 고갯마루
태곳적부터 거기 산마루턱에 이르면
울고 웃다 그렇게 한 고개를 넘었지
보릿고개도 아니고 아리랑 고개도 아니고
삼 년 고개는 더더욱 아닌, 인생 고개
눈물과 웃음 시나브로 쌓아 올린 영(嶺)
가리개 하나 없이 빈 몸으로 견딘 삭풍
피도 눈물도 없는 장승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았지
덕지덕지 덮어쓴 아픈 세월의 흔적
허허로운 가슴을 열고
질펀한 굿판 한판 벌이고 싶다
마지막 춤이라도 추어보려고
짙푸른 숲을 지나
장단을 잘 맞추는 용추폭포를 찾아가
제멋대로 흔들리는 깃발처럼 춤추며
나 또한 고개 넘어가리
반닫이
오랜만에 들른 친정집 건넌방
굳이 지난날 말하지 않아도
오래된 반닫이에서 양반가 규범이 흘러나온다
보상화형에 제비초리 모양의 경첩
간결하고 절제된 선이 단아해서 친근하다
언뜻 투박한 겉모양 퉁명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검은 무쇠 경첩 사이마다 나뭇결 사이마다
어머니 손때를 그대로 새겨 놓은 듯
은은한 무늬가 되어 반백 년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주제넘은 욕심 버린 지 오래라는 듯
방 한쪽 벽에 기댄 채 다소곳이 눈 내리깔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 다 열려도
반만큼은 굳이 열 수 없다는 저 고집
수줍은 듯 입 다문 자물통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규방 처녀처럼
은밀한 비밀 한둘쯤 남몰래 감춰두고 싶은 여인 같다
무엇이든 믿음이 가는 내 어머니 여기 계시다
생의 고비마다 덕지덕지 찌든 가난
눈물 자국처럼 얼룩져도
아리고 아픈 속 반만은 접어두고
언제나 속내를 다 드러내는 일 없는 여인
과장과 허식은 모른다는 듯 수수하다
연리지連理枝
말없이 돌아누워 잠 못 드는 늙은 부부
등을 마주 댄 채 궁리 중이다
낮에 토닥거림, 마음에 걸려 뒤척인다
나란히 누워도 등 돌린 사이
부대낀 세월, 오십 년이 파노라마로
두런두런 지나가고 있다
청실홍실 엮으며 청사초롱 불 밝히는 날
뿌리는 달라도 이제는 하나라고 약속했는데
사는 동안 수없이 마음은 갈라섰다가도
둘 사이 이어진 잔가지를 바라보며 살았지
뿌리는 달라도 하나로 통하는 우리라고
심사를 달래는 동안
나무 등걸처럼 거칠어진 주름 사이로
젖은 숨소리 들린다
아직 우리는 살아있구려
슬며시 맞잡은 손과 손
강물처럼 흐르는 정이 상처를 꿰맨다
이사 가는 날
좁은 골목, 트럭 한 대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방금 버려진 세간살이 몇 개
휘청거리는 흙먼지에 감았던 눈을 뜨고
모퉁이로 사라지는 이삿짐 트럭을 바라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
둥글게 빈 밥사발
오래전 내가 파놓은 묘혈墓穴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텅 빈 그릇에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 주인의 밥상을 지켰을 저 빈 밥그릇
버려진 운명 원망도 없이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 가득 담고
고스란히 식탁에 오를 것 같다
소록도
바다와 섬의 경계는
밀려오는 미망으로 서성이며
서러운 탄식이 갇힌 곳
한 마리 작은 사슴으로 누워있는 땅
슬픔마저 사치스런 문둥이들
죽음보다 기막힌 상처가 매달려 있다
수탄장 감금실. 단종 대
거기 말라붙은 눈물이 얼룩진 탄식으로
내 귓전에 와 닫는다.
가는 곳마다 혈은 같은 비릿한 흔적
문득 내비쳐진 그들만의 외로움
누가 말했나? 천형天刑이라고,
지난 한숨과 애환을 끌고 가는 구름 사이
푸른 하늘이 길을 연다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햇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노을이 되어
절룩이며 서산마루 넘어가고 있다
그림으로 쓴 역사책
- 반구대 암각화
그림으로 쓴 역사책 / 안행덕
( 반구대 암각화 )
태화강 상류 병풍처럼 펼쳐놓은 암벽 사이를 흘러가는
대곡천(川)은
몇 천 년 동안 암벽을 안고 돌며 역사 공부를 한다
선사시대 저 먼 옛날 맨살로 암벽에 매달린 수염 텁수룩한 남자를 만나고 벼랑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를 들으며 돌돌 졸졸 외우며 흘러간다.
옛날 옛적에 그 사내는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쪼아내고, 긁어내고, 점으로 새기며 간절한 바람을 손가락 몇 개로 조율했을 돌도끼 소리 음률처럼 들리는데,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는 목젖이 붇고 핏줄이 서고 손등이 터진 아픔을 견디며 혼신을 담아 이 역사책을 만들며 생명 없는 그림을 살려내려고 무당처럼 신을 불러들이고 주술을 걸고 기원하며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아찔하게 매달린 채 숙명처럼 망치질로 역사를 기록했는데
수염고래, 귀신고래, 작살에 맞은 고래, 새끼 밴 고래, 상어, 물개, 물범, 독수리, 늑대, 여우, 거북이, 멧돼지, 표범, 너구리, 새끼 밴 호랑이, 함정에 빠진 호랑이, 교미하는 곰, 새끼를 거느린 사슴, 짐승을 잡는 사냥꾼, 작살 창을 든 사람,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어부, 그물에 걸린 물고기, 춤추는 남자. 악기를 부는 사람, 탈을 쓴 무당, 옷 벗은 남자, 여자의 뱃속까지, 배 속의 아이까지 남자가 아는 모든 것을 바위에 그림으로 새기며 후손을 염려하고 걱정했겠지 남자의 거친 숨소리 토해 낼 때마다 한 마리씩 한 사람씩 그림으로 살아나 역사책으로 들어간 이야기를 대곡천은 날마다 암기하며 우리에게 전하네
오늘도 반구대 대곡천 물살이 출렁일 때마다 바위에 새겨진 선사시대 생물들 잠시 우르르 벌떡 일어났다가 벼랑의 암벽, 그림책으로 다시 들어간다
낮달을 보며
서편 하늘에 하얀 낮달이 떠있다
어머니 산소를 내려오면서
눈이 흐려진 탓인지 하늘도 희붐하고
서쪽 하늘에 걸린 낮달도 희미하다
너무 얇아 작은 바람에도 지워질 것 같다
빛나는 가문에 동분서주 바쁜 지아비 그늘
언제나 말없이 조용해도
자식들 가려운 곳 가야할 길
잘도 짚어주시던 어머니
조용히 머리 숙인 수도자 같은
지금은 산그늘에 잠드신 내 어머니 같다
하얗게 늙어 윤기 없고
흰나비처럼 애잔하고 바람처럼 가볍던 내 어머니
세모시 하얀 적삼에 조용한 미소로
서쪽 하늘에 떠있는 하얀 낮달
누가 낮달이 지는 걸 본 일 있는가
문경 새재에서
과거보러 가는 길 한양 가는 길
괴나리봇짐에 짚신 매달고 선비가 걷던 옛길
새들도 울고 바람도 구름도 울었다는 고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네
고개마다 구릉마다 쌓인 사연 얼마인가
주흘산, 조령산의 긴 탄식과 한숨
하얀 폭포가 되고 푸른 계곡이 되었나
벼랑에 매달린 야윈 저 소나무
몰아치는 눈바람 비바람에 제 살 내어주고
기기묘묘해진 손가락
바위를 잡고 천 년을 버티었구나
굽이마다 떠돌던 전설, 하늘에 흰 구름 되어
호수에 제 그림자 드리우고 내려다볼 뿐
새재鳥嶺가 된 사연
구구절절 아직도 다 풀어 놓지 못하는가
나 여기 옛길에서 한 잎 풀잎 되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옛날을 만나네
산소 같은 사람아
별 하나
수억 광년을 달려 내게로 왔다
말하지 않았어도 약속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만나고 술잔을 부딪치고
비명을 토해내고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별이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의 우여곡절에도
당신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가끔은 너는 누구냐 물음표를 던지면서
공기 속, 산소가 소중한 줄 모르듯
우리는 늘 함께 살았다
어느덧 잔은 점점 비워지고 별은 흐르고
꽃이 피면 꽃은 반드시 지는 것이
우주의 원리
이별을 앞두고 내게 묻는다면
너는 공기 속에 산소 같은 사람
벌새와 보리수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날개를 가진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새
먹고 사는 일이 그 작은 날개에 달렸기에
일 초에 오십 번 이상 흔들어야
공중에 뜰 수 있는 숙명의 벌새와
태어나서 한 발짝도 떠나본 적 없는 보리수
외딴집 창문 밖에 서 있는 나무
서로 위로하다 친구가 되어네
보리수는 낮이나 밤이나 두 팔 벌려
쉬어가라 쉬었다 가라하고
벌새는 먹이만 축내지 않고
외로운 나무에 세상 이야기 전하는데
종달새처럼 아름다운 노래 없어도
쑥국새처럼 애달픈 사연 없어도
파르르 파르르 잦은 날갯짓에서
바람 같은 사연 무심히 뚝뚝 떨어지고
낯설고 신기한 세상 이야기들
나뭇잎마다 푸르고 산드러지게 매달며
나무는 밤낮없이 외딴집 창문을 지켜도
설익은 일탈을 꿈꾸지 않는 건
고 작은 새의 수화 때문이리라
살랑살랑 바람의 장난기 심해지면
주인이 매단 새들의 먹이가 흔들리고
작은 새 날개는 더욱더 바빠지는데
나무는 한평생 문밖을 나가본 일 없어도
세상 물정 다 아는데, 그것은
벌새의 바람칼에 묻어온 사연 때문이라네
적막한 날에
냇물이 여울을 이루다가 머뭇거리는 곳
물 위엔 흰 구름 한 조각 한가롭네
주변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고
그믐 같은 마음으로
갈 곳 몰라 멍하니 서 있는 나
가장 절박한 순간이 언제일까
불순한 마음
묵음으로 납덩이가 내 가슴을 억누르는 순간
툭 떨어지는 나뭇잎
조용하던 물 위에 작은 나뭇잎 하나
물살을 흔들어 동그라미 그리며
물에 뜬 흰 구름을 지우고 파문을 그린다
적막한 마음을 흔드는 나뭇잎 하나
갑자기
어찌하여 내 속이 자꾸 넓어지는지
일렁이는 물살 따라
내 마음의 여백으로 환한 빛살 쏟아지고
나는 무아의 한 마리 새가 되려하네
대추차를 끓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시름을 달래려
찻물을 올려놓고
마른 대추 몇 개 넣고 기다린다
무엇이 그리 분하고 억울한지
찡그린 얼굴로 웅크린 채 물에 뜬다
뜨거운 열기에 물살이 뒤척일 때마다
달아오르는 신열을 참지 못해
방방 뛰며 억울해 못 참겠다는 듯
몸부림치는 그 모습 나를 닮았다
뜨거운 열기 속의 대추처럼
한바탕 몸부림치고 싶은 날, 더러 있었지
아무리 단단히 다져진 속이라도
백도의 열에는 견딜 수 없나 보다
그 뉘를 사모하였기에 저리 붉은 심사 토해낼까
한 계절 바람과 햇살과 맺은 언약,
뜨거운 눈물로 달래며
고백하듯 풀어내는 닫혔던 마음
영동 회화나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영동할미의 심술도
천둥과 번개의 협박도 말없이 견딘 회화나무
가지를 다스리며 오래된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가슴팍과 허벅지 상처는 경전처럼 경건하네
칠북면 영동리에 터를 잡은 지 500여 년,
동구 밖 외로운 정자로 살아도 외롭지 않은 건
나무도 오래되면 신앙이라고 지나는 길손마다 합장하지
긴긴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옹고집, 하늘도 땅도 놀라는데
천연기념물 319호 칭호가 노거수老巨樹의 고뇌를 달래주네
해마다 연노랑 나비 날개처럼 곱게 피고 지는 꽃잎마다
새겨 놓은 사랑이야기 질펀하게 떨어지면 언약도 깊어지고
동서남북 사방에 드리워진 넓은 그늘만큼
회화나무 전설도 무장 무장 커가고
꽃 진자리마다 차례대로 열리는 그리움 서럽기도 하련만
꼬투리는 말없이 잘록잘록 소원을 담아내고 있구나
회화나무
신선한 그늘에 은은한 향기
귀신도 범접 못 한다는 괴목槐木
거목이 되어서 천 년을 산다는 나무
부는 바람도 온갖 풍상도
다 잠재우는 신령한 회화나무는
아픈 상처를 달래주는 명약이 되어
전설 속 도사보다 신명하다네
매무새 상관없이 이름값 하는 나무라고
집안에 심어두면 정승이 나온다는
영화나무부터 불러보자
회화나무, 괴화나무, 홰나무,
학자수, 신령나무, 정자나무,
이름마다 감탄사 절로 나오네
허공을 이고 선 회화나무, 아득한 중심
하늘 가득 푸른 배래기 띄워두고
거목의 꿈 익어가는 8월이 오면
연노랑 나비 같은 꽃송이 날개를 접고
뜰아래 툭 떨어져 바닥에 수를 놓네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바람 소리 들으며 윤산 오솔길을 걷고 있다
부는 바람에 못 이긴 듯 낙엽 한 잎 툭 떨어져
내 발길을 막는다
오가는 세월에 길들었을 낙엽이지만
아직도 떠나간다는 것이 서러운가 보다
가을을 노래하고 고백하는 나무의 붉은 심장 같은 낙엽
기도하는 마음으로 떨어진 잎을 주워들었다
한여름 푸른 날의 나뭇잎처럼 나도 한때는
꿈 많은 젊음 있었는데
머지않은 날 낙엽처럼 기억 저편을 접으며
시린 가슴 여미고 외로운 길 떠나야겠지
눈 들어 둘러보니 푸른 솔밭 사이마다 한해살이 나뭇잎
붉게 물들어 가을 산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개옻나무 상수리나무 담쟁이넝쿨 너도나도 고운 옷 갈아입고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더 낮은 곳에는 풀잎과 풀꽃도
한 줌 볕이 아쉬운 듯 작은 두 손으로
햇살 잡아당기며 겨울 채비를 하는 듯 아시시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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